당신, 왜 사과하지 않나요?
- 해리엇 러너
관계는 일직선이 아니라 원형으로 작동하며, 한쪽의 행동이 다른 쪽의 행동을 유발하거나 강화한다. 그러므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누가 시작했는지,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양쪽이 어떻게 각자의 행동과 반응을 조정해야 하는가이다.
가해자에게 말이 통할 것 같지 않다고 생각되면 강도를 높이고 길게 말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향이다.
하지만 이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감정적인 주제에 대해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상대가 귀를 닫아버린다는 점은 분명하다.
특정 행동 비판에서 벗어나 안 그래도 취약한 상대의자존감에 도끼를 휘두른다면 상대가 자신의 가해 행동을 반성하고 내게 공감하거나 후회하며 회복하려고 애쓸 가능성이 대폭 줄어든다.
"사과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사과해야 할 만한 행동을 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하지만 비난은 섞이지 않은 응답이었다.
권위가 떨어질까봐, 나약해 보일까봐 자녀들에게 사과하지 않으려는 부모들도 있다. 하지만 부모의 진솔한 모습은 자녀들에게 세상의 공정함을 인식하게 하고, 현실 감각을 심어준다. 더 나아가 열등감이나 체면을 걱정하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는 방식도 배울 수 있다.
사과를 발판으로 잔소리나 설교를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반사적인 반응이다.
사과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나 용서되는 것도, 추후 다시 논의할 여지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점
처음에는 '네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조앤은 사과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마샤의 잘못된 행동을 그대로 갚아주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려는 성숙함을 보인 것이다.
한 어머니가 아들 반에 흑인 학생이 둘인데 "아주 깔끔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아버지가 "흑인이긴 한데 깔끔하고 예의 바르다고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라고 되물었다. 그 어머니는 무의식적으로 인종주의가 드러날 때 누구나 그렇듯이 아주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음 날 다시 운동장에서 만났을 때, 그 어머니는 “사과할게요. 제 말을 인종주의 발언으로 들으셔서 유감이에요. 전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거든요”라고 말했고, 다른 아버지는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제 반응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는 거라면 그 사과는 받아들일 수 없겠네요”라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 어머니는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주장하며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늘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해야 하는 것이 지겹다고 말했고, 결국 그 아버지는 잠깐 머리를 긁적이더니 “우리 두 사람은 이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 같군요”라는 말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아버지의 대처는 참으로 훌륭했다. 더 이상 논쟁을 이어가지도 않고,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대신 그 어머니가 자기 말의 함의를 생학해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그 어머니도 깨닫게 될 날이 있으리라.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싸움을 끝내고 관계의 긴장을 낮추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터놓는다는 의미이다.
습관화된 유형이 금방 바뀔 것으로 기대하면 곤란하다. 이나가 하루아침에 침착한 성품이 될 수는 없고, 샘도 아내의 비난 앞에서 갑자기 평정심을 유지할 수는 없다.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방향임을 기억하라.
누군가 불친절한 언행을 보이면(예를 들어 슈퍼마켓 계산대 직원이 우리를 함부로 대하면) 어머니는 “저 사람은 아주 불행하구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기분 상한 것을 달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차분한 관찰 결과였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씀을 “기분 나쁠 것 없다. 불행이나 불안정감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든단다. 누군가 불친절하게 행동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일 뿐 너 때문이 아니야”라고 해석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동의 동기를 잘못 읽을 수 있고, 혼자 착각하거나(어째서 내가 저 사람 마음에 안 들었지? 청바지가 너무 낡아서 그런가?), 아니면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만다(안 그래도 삶이 힘겨운데 왜 저사람들까지 저렇게 가혹한 걸까?)는 것이다.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가 결국 책임을 지지 않을 때 우리 두뇌는 자꾸만 억울한 감정을 재생해낸다(“어떻게 자식들한테 그럴 수 있었을까?”). 분노는 충분히 수긍이 가지만, 이는 생산적인 문제 해결을 이끄는 대신 우리 두뇌에 커다란 부정적 구멍을 남기고 숙면을 방해한다. 그렇지만 분노와 증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부정적 감정을 수면 아래 가라앉힌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분노,고통, 후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다. 자신을 배신하거나 험담한 친구가 벌을 받기를 바라는 양심에 찬 인간이 아닌, 선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용서하고 싶어요"라는 말은 "이 일을 떠나보내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어요"라는 뜻이다.
떠나보냄은 벗어나지 못하면서 겪는 고통에서 우리를 보호해준다.
작은 상처든 크나큰 배신이든, 다만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의 행동을 용서할 필요는 없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감정적 짐을 서서히 내려놓으면 되는 것이다. 가해자가 용서를 빌 생각이 없거나, 혹은 사망 등의 이유로 용서를 빌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어깨 위에 그 가해자를 계속 메고 갈지 말지를 선택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용서와 관련해 사람들을 상담치료하면서 깨닫게 된 진실 하나는, 자신을 부정적 감정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가해자를 용서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를 다시는 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부족하거나 차가운 사람인 것은 아니다. 분노의 잔재가 남았다 해도 나는 더 강하고 더 용감한 사람일 수 있다.
첫째, 인간관계란 먼저 성취하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경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전남편은 겉보기보다, 또한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행복하지 않을 터인데, 그 이유는 남을 속이고 멸시하는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전남편의 멋진 삶을 시기하고 분노하지만, 그럼에도 카트리나가 남편 입장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전남편이 했던 짓을 하는 사람은 되기 싫은 것이다. 자존감은 돈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실라가 "그래. 나도 너한테 뭔가 신호를 보냈어야 했어. 그러니 나한테도 책임은 있는 거지"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떠나보냈다. 진정한 사과는 상대의 상처받은 마음에만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사과하는 쪽이 무언가 얻기를, 내 겨웅에는 용서 혹은 일부의 책임 인정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관대하라
지나친 희생을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요구에 굴복하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책임 없는 일에 대해 사과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남들의 취약함에 대해 관대하라고 말하고 싶다. 친밀한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상대가 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대신 보듬어주기를 기대한다. 생각해보라. 중요한 사람에게는 정말로 그렇게 기대하지 않는가?
진심 어린 사과는 그 관계의 가치를 인정하고, 핑계나 비난 없이 우리 측의 책임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이 과정은 자기주장이나 정당화보다는 상대의 행복과 관계에 대한 투자이다. 사랑하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고 상대의 감정이 과장되고 때로 자기 책임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내 쪽의 책임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