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horism

이해

R.S.D 2011. 3. 24. 22:12


타인을 사귈 때에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어떤 동기에서 동력을 받아 행해지게 될까. 고통이란 매우 강력한 사랑의 촉매제로 작용한다. 자신을 평화롭게 하는 이에게는 결코 간절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고통으로 자극받게 되면 엄청난 정열을 품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고통은 지극한 이해를 부르기도 한다. 잘못은 상대방이 했는데 정작 나는 어떻게든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하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나 자신을 설득하고 나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상대로 인해 생겨난 분노의 감정이 상대방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판단을 바꿔놓는 이 아이러니. 바로 고통의 힘이다.

A의 사연은 이랬다.
남자친구가 일 문제로 보름간 미국 출장을 갔다. 한 도시에서 머무르는 것 치고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문제는 역시나 연락이다. 뻔히 로밍이 되어있는 걸 아는데도 문자 한 통 없다.
'바빠서 그렇겠지.'
세상에 아무리 바쁜 사람도 문자 보낼 시간 몇 초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하루가 지난다. 이틀이 지난다. 화가 난다. 그러나 역시 화는 이해로 가기 위한 노력에 의해 묻혀버린다.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너무 바빠서, 외국이라 힘들어서,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일들이 있을 거야. 나는 외국 출장 같은 것 한 번도 가본 적 없으니까. 너무나 경황이 없겠지. 어쩌면 문자를 보냈는데 '거리가 멀어서' 늦게 오는 걸 수도 있고.'
A의 노력은 끝없이 계속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그것을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고자 하는 순수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자신이 보통의 존재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불과하다.

동기가 불순하면 행위도 순수하지 못하다고 했던가. 고통으로 자극받아 피어난 사랑은 새로운 고통이 수혈되지 않으면 사그라지고 마는 것처럼, 이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결코 상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 이석원 산문집 [보통의 존재] 中 '이해'